2011년 3월 23일 수요일

율곡 이이의 묘

율곡 이이의 묘(후손이 번창하지 못한 연유)

율곡 이이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숙헌(叔獻)이며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다. 증좌찬성 원수(贈左贊成 元秀)와 사임당 신씨의 아들로 명종 3년(1548) 강릉에서 출생하였고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신사임당이 흑룡이 집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고 율곡이 출생하여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하였으며 산실(産室)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율곡은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명종 3년(1548)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명종 6년(1551) 16세 때 어머니가 졸하자 파주에 장례식을 치르고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으며 명종 16년(1561) 26세 때 아버지가 졸하여 파주에 장례하였다.

금강산에 들어가서 1년 동안 불교 공부를 하고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23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를 지어 장원하고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명종 19년(1564)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어 예조(禮曹), 이조좌랑(吏曹佐郞), 춘추기사관(春秋記事官), 좌부승지(右副承旨),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7년(1574) 39세에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 다음해에 성학집요 (聖學輯要), 42세 격몽요결(擊蒙要訣), 45세 기자실기(箕子實記), 47세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 등을 편찬하고 선조 17년(1584) 49세에 졸하여 파주 자운산에 장례하였다.

문묘에 배향되고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 구암서원(龜巖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 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율곡의 후손이 번창하지 못한 연유는 율곡의 묘와 부모의 묘가 길지에 안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율곡의 묘는 묘좌(卯坐) 유향(酉向) 유파(酉破)이기 때문에 묘유(卯酉) 충(冲)을 하고 두 번째 부인 김씨는 황천살(黃泉煞)에 안장되어 있으며 세 번째 부인은 북한에 안장되어있다.

황천살(黃泉煞)은 2대가 안장되면 그 후손이 절손되는 예가 많은데 사망하여 황천살에 안장되면 망자의 자손이 사망하여 다른 지역에 안장하더라도 황천살에 안장되어 그 후손이 절손되는 예가 많이 있다.

황천살(黃泉煞)은 청오경(靑烏經)에 격팔상생법((格八相生法)으로 봉분을 조성할 수 있다고 되어있으나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풍수지리학에서는 여러가지 기(忌)하는 것이 많이 있으나 그중에 제일 피해야 하는 것이 황천살(黃泉煞)이다. 그러나 요즈음도 황천살(黃泉煞)에 안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율곡 이이 선생의 후손은 현재 약 2백 명이고 율곡 선생보다 12년 후에 출생한 사계 김장생 선생의 후손은 현재 약 6만 5천 명이 된다. 필자는 유명인 100명의 4대 조상의 묘를 답사하여 본 결과 반드시 조상과 후손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사계 김장생은 길지에 안장되어 있는 고조부모의 음덕으로 출생한 것으로 보며 본인이 길지에 안장되어 있고 손자역시 천덕의 길지에 안장되어 있다.

망자가 길지에 안장되면 그 후손이 사망하여 다른 지역에 안장하더라도 길지에 안장되는 예가 많이 있는데 그 연유는 음보의 덕으로 본다.

사람들은 조상을 반드시 길지에 안장하여야 하고 율곡 이이선생과 같이 한 지역에 묘를 조성하여서는 아니 된다. 만일 길지이면 같은 지역에 안장하되 망자의 생년에 맞추어 재혈하여야 한다.

율곡 이이 선생의 역장에 대하여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이지역에서 재혈를 잘하였으면 후손이 번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계 김장생 선생 부모도 역장으로 안장하였고 사계 선생 역시 7대 조모 위에 안장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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